The Wapshot Scandal

me/literature 2011.11.27 23:44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3
The Wapshot Scandal by John Cheever



재밌다!
존 치버의 담담한 묘사와 풍자가 너무 좋다.
연대기보다 더 짜임새있었다고 해야되나.. 연대기에서, 리앤더가 화자로 나오는 부분이 무척 싫었는데, 몰락기는 리앤더가 죽었기 때문에 더 재밌었던 것 같다. (ㅎㅎㅎ) - 하지만 연대기에서 리앤더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단지 그의 필체가 싫었을뿐!
하나같이 속물들인 멜리사나 벳시라는 인물들. 어찌 그리 수많은 좋은 여자들 중 악질들을 골라 자신들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왑샷의 몰락은 리앤더에서부터 서서히 진행되다가 코벌리와 모지스에 와서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데만 걸린 시간 무려 17일. 일때문에 책조차 읽을 시간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게 삶인가?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취미생활 하나쯤 영위할 수 없다면
내가 보기엔 영혼이 없는 삶이다.
경력은 쌓지만 자기 자신은 어디있지? ㅡㅡ

****************************************

1부
...그렇게 사람들의 껍질을 뚫어 버리는 것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구석진 곳에 사는 불행한 주정뱅이 여자가 벌거벗은 서정 시인 수십 명이 숲 속에서 자신의 뒤를 쫓는 꿈을 자주 꾼다 해도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멜리사는 따분했다. 춤을 추고 있는 이웃 사람들도 따분한 것 같았다. 외로움도 심각한 문제였다. 그녀는 외로움에 시달리다 보면 빛과 말동무가 아주 다정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따분함은 다른 문제였다. 세상 어느 곳보다 번영을 누리고 있으며 공평한 이곳에서 왜 모든 사람이 따분하고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 걸까? -73p

그녀는 범프스 트리거에게 술을 좀 가져다 달라고 했고, 그는 그녀에게 짙은 색의 버번을 한 잔 가져다주 었다. 그녀는 깊은 향수를 느꼈다. 그녀가 꿈속에서도 알아보지 못한 감정의 섬이나 반도를 향한 갈망. 그 녀는 그 땅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은 낙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적인 풍요로움 과 자유 덕분에 기분이 들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보 다 훨씬 더 낫게 살 수 있다는 굉장한 느낌이었다. 위싱 부인의 무도회는 현실이 아니고, 이 세상은 선과 악으로 엄격히 나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욕망이라는 절대적인 권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 -74p

난봉꾼은 우정이라는 기쁨을 맛볼 수 없으며 경찰의 의심을 받는다. 때로는 직장을 잡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털이 많고 무식하게 생긴, 결혼한 이웃에게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모지스가 멜 리사와 함께 나누고 있는 화산 지대는 엄청나게 넓었지만, 그에게 화산 지대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것 외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좋아하는 위스키 상표도 서로 달랐고, 좋아하는 책 과 신문도 달랐다. 사랑이라는 어두운 원 밖에서 보면 두 사람은 거의 생판 남 같았다. 그는 기다란 만찬 탁자 저 아래쪽에 앉아 있는 멜리사를 흘깃 바라보며 밝은 색 머리카락의 저 예쁜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침대에서 보여 주는 난폭함, 그의 자상함이 순전히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을 멜리사는 어느 날 아침에 알아차렸다. 홀에 있는 탁자의 서랍을 열었더니 한 달 또는 6주 전의 날짜가 표시된 메모 묶음이 나왔던 것이다. 메모의 제목은 '음주 기록'이었다. 메모의 내용은 이러했다. "12일 정 오 마티니 석 잔. 3:20 강장제 한 병. 5:36~6:40 기차에서 버번 석 잔. 저녁 식사 전에 버번 넉 잔. 모젤 포 도주 0.5리터, 저녁 식사 후 위스키 두 잔.날짜가 바뀌어도 메모의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메모지를 다시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잊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75p

둘 중 누구 하나는 꼭, 잊어야 하는 관계들. 우리 주위에 자꾸만 나타나는 갖가지 얼굴들 중에는 특정한 왕국의 동전에 새겨진 얼굴처럼 보이는 얼굴, 즉 똑같은 이목구비와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전에 존슨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중에 누군가를 보고 존슨이라고 생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성숙함'이라 는 단어를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긴 얼굴을 갖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갑작스러운 상실과 무례한 타격을 여러 번 겪었지만, 그런 감정적 상처는 아무리 봐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성실하고, 소박하고,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세상에는 세계 일주를 세 번이난 하는 사람도 있고, 이혼하고 재혼하고 다시 이혼하면서 아이들과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큰돈을 벌어 낭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돌아가 보면 똑같은 창문에 똑같은 얼굴들이 있다. 담배와 신문을 파는 영감님도 똑같 은 사람이고, 우리가 아침마다 인사하는 엘리베이터맨도 똑같은 사람이며, 저녁마다 인사하는 사무원도 똑같은 사람이다.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모두 못이 바룻바닥에 박히듯 불운 때문에 삶 속으로 밀 려온 사람들 같다. -79p

...존슨은 2층으로 올라가 장애물 경주 그림이 그려진 잠옷을 입은 뒤 페이퍼백 소설을 읽었다. 그것은 재산이 수백만 달러나 되고, 로마, 파리, 뉴욕, 호놀룰루에 각각 집이 있는 젊은 여자에 관한 소 설이었다. 1장에서 그녀는 스키 산막에서 남편과 그 짓을 했다. 2장에서는 식품 창고에서 집사와 그 짓을 했다. 3장에서는 그녀의 남편과 집사가 수영장에서 그 짓을 했다. 그 다음에는 여주인공이 하녀와 그 짓 을 했다. 그때 남편이 그 두 사람을 발견하고 함께 즐겼다. 그 다음에는 요리사가 우체부와 그짓을 했고, 요리사의 열두 살짜리 딸이 말구종과 그 짓을 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600쪽이나 계속될 터였다. 그는 이 이야기가 어딘가의 종교 기관에서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류가 아는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해 본 여주인공은 머리를 박박 밀고 납반지를 낀 채 어딘가의 수녀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타 락한 남편이 수도사들이 신는 조잡한 샌들 차림으로 산골의 병든 창녀에게 가져다줄 항생제 병을 들고 눈 보라 속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외로운 남자가 읽기에는 한심한 작품 같았다. 존 슨 자신처럼 이 딱딱한 침대에 누워 외롭지 않은 삶을 갈망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독이 저절로 증식하는 것 같았다. -85p 천재적이다

...캐롤라인이 그에게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벳시 언니가 어떤 남자랑 결혼했는지 만나 보고 싶 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뱀브리지 사람들은 벳시 언니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언니 가 워낙 이상한 사람이라서." 코벌리는 이 말 속에 독설이 숨어 있음을 깨닫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가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치 기로 했다. 그냥 조지아에서는 '이상하다'는 말이 매력적이고 독창적이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쓰이는 모양 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99p

캐롤라인은 사흘간 머물렀다. 그녀가 비극적인 인간사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는 점과 모든 물건에 립스틱 자국을 남겨 놓았다는 점만 빼면 그럭저럭 참아 줄 만한 손님이었다.(저녁 식사 전에 그녀가 한 말만 잊어버린다면.) 그녀는 입이 큰 편이었는데 거기에 립스틱을 진하게 발랐기 때문에 컵과 유리잔, 수건과 냅킨에 모두 자주색 립스틱 자국이 남았다. 재떨이에는 립스틱이 묻은 담배꽁초가 수북했 고, 화장실에는 항상 자주색 얼룩이 묻은 크리넥스가 있었다. 코벌리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히 부주의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행동이었다. 자기가 아주 잠깐 머무르다 떠날 이 집에 자신을 각인시키는 간접적인 방법 같은 것. 자주색 얼룩은 그녀가 외로운 여인이라는 표식 같았다. -101p
 
사람들은 결혼 생활의 비밀을 무엇보다도 빈틈없이 감춘다. 코벌리도 바름을 피운 이야기라면 거리낌 없 이 할지도 모른다. 그가 감추고 싶은 것은 정절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었다.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일로 그 를 비난한 것이나 그의 셔츠에서 단추를 잘라 버린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팬티를 태워 구멍 을 내고, 그에게 납을 먹였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현관문을 잠가 버리면, 그는 창 문으로 기어 들어갈 것이다. 만약 그녀가 침실 문을 잠가 버리면, 그는 자물쇠를 부술 것이다. 만약 그녀 가 그에게 독설을 퍼붓고, 그를 비난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도끼나 고기 자르는 칼을 휘두른다 해도 문 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맷돌, 그의 족쇄, 그의 천사, 그의 운명이었고, 그가 품은 가장 화려한 꿈 의 원료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올아 가겠다고 말했다. "괜찮아." 벳시가 말했다. "괜찮아." -106p

...제임스타운에서 로티의 색욕을 의심했다. 애슈터블라에서는 옷을 넣어 두는 벽장에서 벌거벗은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클리블랜드에서 현장을 잡았다. 황금 커프스단추를 팔아 3월 18일에 증기 기관차를 타 고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나쁜 감정은 없었다. 웃으면 세상도 함께 웃는다. 울 때는 혼자다. -120p

그녀는 대개 그에게 맥주를 한 잔 주고 부엌에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그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를 흥 분시켰다. 자기가 아주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세속적인 면, 교묘함이 조금씩 그에게 전염되 어 식품점 점원으로 일하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오후, 그녀가 아주 수줍은 표정 으로 느닷없는 말을 했다. "있잖아, 넌 성스러워." 그는 그녀가 돌아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가끔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 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여자 옆에서 빈둥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만약 그가 성스러웠다면 벌써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성스럽고 스스로도 그 사 실을 알고 있다면 성스러움이 드러나지 않게 숨겼을 것이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자기 보호 본능 때문에. "가끔 내가 잘생겼다는 생각은 해요." 그는 그녀의 찬사를 조금 다른 말로 바꾸려고 열심히 애썼다. 그가 맥주잔을 비웠다. "이제 가게로 돌아가 봐야 돼요." -138p 여자들이 가끔씩 얼마나 얼빠진 소리를 해서 정 을 떨어뜨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하하하... 그렇지 않은 이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걸 보 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

...그녀는 몸을 덜덜 떠는 노인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30대 남자였다. 그는 몸에 꼭 붙는 청바지에 짙은 색 스웨터를 입고 뒷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그녀의 집 앞 계단에 서 있었다. 그가 가슴을 묘하게 내밀고 있는 것이 자부심의 표현 같기도 하고, 우정의 표시 같기도 하고, 추파를 던지 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피부는 가무잡잡했고, 입 주위에는 부츠의 봉합선처럼 깊은 주름이 나 있었으며, 눈은 갈색이었다. 그의 미소는 추파 그 자체였다. 그는 그런 미소밖에 지을 줄 몰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몰 랐다. 그는 삽을 향해서도 그렇게 요염한 미소를 지었고, 위스키 잔에도 요염한 미소를 지었고, 자기가 파 놓은 구덩이를 향해서도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면 자기 차의 시동 장치를 향 해서도 요염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녀는 그에게 위스키를 권했지만 그는 나중에 마시겠다고 말했다. 그 녀가 그에게 연장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자 그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142p
 
...어느 날 오후에 그는 탤리퍼에서 뉴욕으로 날아가 플라자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 루치아나에 대한 갈망 이 단순한 굶주림의 충동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졌다. 호텔 침대에 누워서 그는 머릿속으로 그녀 의 모습을 하나씩 그려 보는 특권을 자신에게 허락했다. 그녀의 입술, 가슴, 팔, 다리, 아, 바람과 비, 그리 고 기꺼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품에 안는 기분이라니! -217p

...그녀는 그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사면을 원했다. 그녀가 바람을 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그 리도 혁명적인 일인가? 그녀의 선택이 틀렸을 지도 모르지만, 그건 역사 속에서 비만큼이나 흔한 일 아닌 가? 그녀는 모지스에게 사실을 털어놓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나면 자신을 집에서 쫓아낼 것 같았다. 그녀는 황소의 뿔에 받힌 것 같았 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여자가 되고 싶었다. 관능적이지만 로맨틱하지는 않고, 유쾌한 기분으로 애인을 사귀다가 때가 되면 역시 유쾌한 기분으로 애인과 헤어질 수 있는 여자.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질 속에 숨어 있던 죄책감과 욕정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점잖은 사회의 규칙을 터겼다. 그 래서 이제는 자신이 경멸하는 예법에 묶여 꼼짝도 못 하게 된 것 같았다.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 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술을 한 잔 따랐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요리사한테 얼음을 달라고 하면 창피할 것 같았다. -302p 누군가에게는 사회의 예법을 어긴다는 것이 트라우마로,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나약한" 진짜 모습을 발견했을 때, 혹은 그럴 위기가 트라우마이다.

멜리사는 그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곳을 찾아왔지만, 차라리 헛간 문이나 돌멩 이한테 그런 감정을 요구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어리석음, 그의 천박함 을 도저히 어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여 주지 않 는다면, 그녀가 오히려 그에게 연민의 정을 발휘해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어 리석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갈채를 보내는 이 뚱뚱하고 단순한 남자를 적어도 참아 주기만이라도 해 보려 고 애쓸 책임 말이다. 그가 벽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일 때 그녀의 마음을 건드린 것은 바로 그의 구식 신 앙심이었다. -308p
 
3부 그는 뚱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사이먼한테 잘못하는 짓이 될 테니까. 하지만 초연해 보이고 싶기 는 했다. 애당초 자기는 여기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는 아래쪽의 사람들을 보 지 않고 대신 카페 뒤의 벽에 걸려 있는 산펠레그리니 광천수 광고판을 노려보았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삼촌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령은? 그가 살던 파시니아의 그 어두운 집은 어디 있는 걸까? -360p

그녀는 그렇게 한다. 사지투리우스 거리에 있는 수프라 마르케토 아메리카노에 가서 수백 개나 되는 카트 중 하나를 꺼낸다. 금속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카트를 밀고 벽처럼 늘어서 있는 미국 음 식들 사이를 지난다. 인생이 안겨 준 타격에 당황해서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이것이 약간의 위로가 된다. 이것이 그녀가 택한 길이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곱슬머리 한 가닥이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려 있다. 눈물 때문에 그녀의 눈이 빛 속에서 반짝이지만, 슈퍼마켓 안에 사람이 워낙 많ㅇ다. 게다가 여자가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장을 보는 일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슈퍼마켓 안의 낯 선 사람들에게 무심하다. 마치 그들이 그녀의 삶 속을 흐르는 개울과 수로에 불과한 것처럼. 사람들로 이 루어진 이 개울가에서 버드나무가 비스듬하게 자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오필리아를 가장 많이 닮았다. 석죽, 쐐기풀, 난초를 엮은 화려한 화관 대신 소금, 후추, 클렌저, 크리넥스, 냉동 대구 완자, 양고기 파이, 햄버거, 빵, 버터, 드레싱, 아들에게 줄 미국 만화책, 자신을 위한 카네이션 한 다발로 화관 을 만든다는 점이 다를 뿐. 그녀는 오필리아처럼 옛날 노래를 흥얼거린다. "윈스턴은 맛이 좋아. 담배라면 당연하지. 미스터 클린, 미스터 클린." 자기만의 화려한 화관이 완성된 것 같아서 그녀는 계산을 한 뒤 전 리품을 들고 그 자리를 떠난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어느 누구 못지않게 위엄 있는 모습으로. -388p 마치 한 여성이 파란만장한 인생의 한 장을 마치고 아픔을 회상하는 영화에서, 엔딩 씬으로 카메라가 위로 빠지는 것을 연상시키는 그런 장면

"오노라 고모님한테 우리가 여기서 크리스마스를 지낼 거라고 약속했어."
 "그 고모님은 돌아가셨다며. 이미 땅에 묻혔다며."
 "내가 약속했어." 순간적으로 아내와 자신 사이의 이 틈새 앞에서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분노 때문인지 절망 때문인지 그의 피가 뭔가 달콤하고 거품이 이는 액체, 그러니까 코카콜라 같은 것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오노라와 한 약속을 깨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벳시의 입장에서는 그가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임을 분명 히 알 수 있었다. 코벌리는 남과 여의 전쟁에서 지고 있는 사람답게 살짝 몸을 웅크린 채 아내와 나란히 걸었다. 반명 벳시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고개를 단호하게 쳐든 자세로 그가 떨어뜨린 자부심 조각들을 모조리 주워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390p

이 여덟 명의 눈먼 손님들은 인간적인 친절함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 가 붐비는 도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사람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상대의 손길 하나로 상냥한 사람 과 독선적인 사람을 구분하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너무나 꺼려 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 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의 무심함을 견디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아온 그들 은 너무나 강렬해서 한낮의 눈부신 빛조차 눌러 버리는 어둠으로 가득 찬 풍경을 함께 끌고 다니는 것 같 았다. 그들은 시력을 잃었지만, 그것은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통찰력을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 다. 마치 인류의 조상이 원래 장님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앞을 못 보는 것이 아주 오래전 인류의 특징 중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은 또한 밤의 미스터리를 응접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듯했다. 황홀감만큼이나 강렬한 불행의 맛, 낙오자, 패배자, 실패자, 이미 놓쳐 버린 것(비행 기, 기차, 배, 기회)을 꿈꾸다가 깨어나서 텅 빈 활주로, 텅 빈 대합실, 텅 빈 수로를 보게 되는 사람들, 죽 음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용히, 참을성 있게, 수줍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399p

신고

'me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Ревизор  (0) 2011.12.12
Повести покойного Ивана Петровича Белкина & Пиковая дама  (0) 2011.11.30
The Wapshot Scandal  (0) 2011.11.27
Et dukkehjem  (0) 2011.11.09
The Wapshot Chronicle  (0) 2011.10.26
La Jalousie  (0) 2011.10.23
Posted by jimmii

댓글을 달아 주세요

Et dukkehjem

me/literature 2011.11.09 22:18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Et dukkehjem by Henrik Ibsen



희곡으로 된 소설은 두 번째 읽는 것 같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이어서.. 
아무래도 무대에서 상연되는, 관객의 인기가 입증된 작품들이라 그런지 술술 읽혀 나가는 듯.
지금 노라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지켜보겠어. ㅎ

나쁘지 않았다. 이 얇은 책 안에서, 좁은 스토리 배경 안에서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대부분이 그런걸까?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갑자기 자신의 명예가 위협을 받자 가면을 벗고 그 안의 비열한 모습을 내보이는.. 그리고 다시 그 말을 내뱉기 전으로 뻔뻔하게 되돌아가길 원하는.. 말 한번 잘못 뱉었다가, 그 말 한마디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빚어내는 것이란, 참 기가 막힌 인생사 중 하나인듯 하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가 비극적이고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겠지만..

****************************************

노라 : 당신은, 내가 당싱늬 그런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거죠? 그래요, 물론이죠. 하지만 내 약속이 당신 약속 앞에서 무슨 힘이 있겠어요? 내가 궁금해하면서 기대한 놀라운 일은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생명도 바칠 수 있었어요.
헬메르 : 나는 기꺼이 밤낮으로 당신을 위해 일하겠어, 노라. 당신을 위해 걱정하고 염려할 거야.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는 사람은 없어.
노라 : 수십만 명의 여자가 그렇게 했어요.
헬메르 : 아, 당신은 생각도 말도 철없는 어린애처럼 하는군.
노라 : 마음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남자처럼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아요. 두려운 일이 - 내게 덮친 일이 아니라 당신에게 닥친 일이 - 사라지고 나자, 그리고 모든 위험이 없어지자,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어요. 나는 다시 당신의 노래하는 종달새, 당신의 인형이 되었고, 이제 당신은 나를 두 배로 더 조심스럽게 받들고 다니겠죠. 그만큼 약하고 힘이 없으니까요. ... 그리고 나는 아이 셋을 낳았죠. 아, 그 생각을 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을 갈가리 찢고 부술 수 있을 것 같아요! -122p

신고

'me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Повести покойного Ивана Петровича Белкина & Пиковая дама  (0) 2011.11.30
The Wapshot Scandal  (0) 2011.11.27
Et dukkehjem  (0) 2011.11.09
The Wapshot Chronicle  (0) 2011.10.26
La Jalousie  (0) 2011.10.23
Петербургские Повести  (0) 2011.10.17
Posted by jimmii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2
The Wapshot Chronicle by John Cheever



괴로웠던 질투를 다읽고 드디어 왑샷 가문 연대기!
기대된다.
모종의…연결고리? 모종의…복선? 모종…삽?
글 부분부분에 흩뿌려놓은 존 치버 식의 비꼬기가 쏙 마음에 든다.

****************************************

1부
...이지키얼은 보스턴에 정착해서 라틴 어, 그리스 어, 히브리 어, 플루트를 가르쳤다. 총독부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이를 거절했다. 이로써 300년 후 리앤더와 그 아들들의 운명을 희롱하게 된, 사려 깊은 사절이라는 가문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누군가는 이지키얼이 "가발을 혐오했으며, 영연방의 안녕을 항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다."고 썼다. 이지키얼은 데이비드, 미카바, 아론을 낳았다...
...데이비드는 로렌조, 존, 야버디아, 스티븐을 낳았다. 스티븐은 앨피어스와 네스토를 낳았다. 영국과의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던 네스토는 워싱턴 장군이 훈장을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이지키얼이 확립한 전통과 일치하는 행동이었다. 이 사려 깊은 사절에는 자신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양키다운 약삭빠름도 일조했다. 눈에 띄는 사람이 되는 것, 영웅이 되는 것에는 성가신 경제적 부담이 따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가문의 어느 누구도 영예를 수락하지 않았으며, 가문의 여자들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이 전통을 더욱 더 확대해 외식을 할 때면 음식을 깨작거리기만 했다. 차를 마실 때 샌드위치를 거절하거나 일요일에 닭고기를 거절하는 것, 아니 무엇이든 거절하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식탁에서 일어설 때 항상 배가 고팠지만, 항상 목적의식을 새로이 다졌다. 홈그라운드에서는 물론 늑대처럼 음식을 먹어 치웠다. -22p

...벌들과 유행에 뒤떨어진 등들이 사라진 문명의 유적처럼 발치에 널려 있었으며, 공기가 엄청나게 싸했다. 마치 18세기의 어떤 조상이 햇볕 쨍쨍한 해변에서 마데이라 백포도주를 마시고 견과류를 먹으며 세월의 흐름을 생각하다가 그날의 열기와 빛을 병이나 바구니 같은 곳에 담아 이곳 다락에 풀어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활기를 잃어버린 여름의 냄새가 났고, 여름의 빛과 소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았다. -24p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서 털 깎는 사람 앞에 모인 엄청난 양 떼처럼 애인들과 함께 북적거렸다. 잘생기고 엄숙하고 키가 큰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우아한 여성들과 가장 훌륭한 집안의 여성들까지 한데 모여 천막 입구 근처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밀쳐 대며 가능한 한 가까운 자리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28p

...공기 중에는 소금 내가 배어 있었다. 동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조금 있으면 이곳은 모종의 목적과 광채와 슬픔을 안게 될 것이다. 부인들은 거리의 집과 느릅나무들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자기 아들들이 멀리 떠나 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은 왜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젊은이들은 왜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40p (how romantic!)

...그녀의 애인은 위스키를 마시고 종이컵을 손으로 구겼다. 왼쪽의 남녀 한 쌍은 가려고 일어섰다. 그들이 가고 나자 그가 다시 물었다. 지금? 지금? 그녀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랑의 힘에서 고독의 힘을 떼어 놓으려고 애쓰느라 지쳐 있었다. 그녀는 고독했다. 그녀는 고독했고, 바닷가에서 물러나는 햇빛과 다가오는 밤 때문에 예민해져서 겁이 났다. 그녀는 마음속 방들 중 적어도 한 곳에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끄러미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마른 얼굴에 색욕이 걱정처럼 내려앉았다. -47p (아, 이 단호한 필체, 너무 맘에 든다)

...우리는 버스와 기차에서, 부엌과 식당에서 할머니들이 피부가 썩어 들어가면서 생긴 상처에 대해 너무나 슬프고 음악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 봐도 결국은 육체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낀 당혹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노라는 굳이 의학 용어를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타협책을 만들어 냈다. 문제의 단어를 첫음절만 발음하고 나머지는 중얼중얼 얼버무리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자궁 절제 수술은 자궁중얼중얼이 되었고, 화농은 화중얼중얼이 되었으며, 고환은 고중얼중얼이 되었다. -62p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죽은 이파리, 죽은 나뭇가지, 죽은 양치류, 죽은 풀. 숲의 모든 것이 죽어서 역한 냄새와 곰팡내를 풍기며 길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95p

...그녀(오노라)는 마침내 웨스트 농장으로 가서 그 집에 새로 온 낯선 여자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녀 빗속을 뚫고 빗속을 가로질러 보트 거리에서 리버 거리로 가서 옆문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이봐, 이봐, 아무도 없어?"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낯선 아가씨가 남는 방에 있는지 보려고 계단을 올라갔다. 서둘러 정리한 침대, 여기저기 의자에 흩어진 옷, 꽁초가 가득 찬 재떨이를 보고 그녀는 불쾌하고 수상쩍은 생각이 들어서 벽장문을 열어 보았다. 그래서 모지스와 로절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벽장ㅊ 안에 있었다. 모지스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둘 다 기분 좋은 일인데 그게 뭐가 나빠요?"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올 때 오노라는 벽장 문을 닫았다.
  그 다음에 오노라가 들은 소리(그녀는 많은 소리를 들었다.)는 지금 우리와 관계가 없다. 이건 냉정한 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폴리네시아에서 태어나 미스윌버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자선 사업을 하는 노부인이 순전히 진실을 찾으려다가 비 오는 오후에 좁은 벽장에 갇혀서 느낀 딜레마만 고려할 것이다.
  그날 오노라가 그 집을 떠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9p

2부
겉으로는 순수해 보이는 풍경. 웨스트 농장을 생각했다. 즐거운 여름날의 기억! 아버지를 생각했다. 돈이 없어서 삶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다. 평생의 교훈은 '돈을 벌어라.'인 것 같았다. 직옥의 불도 욕망만큼 강렬하게 타오르지 않는다. 가난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누가 도둑인가? 가난한 사람. 누가 주정뱅이인가? 그것도 가난한 사람. 차든 거리에서 딸들이 낯선 사람에게 다리를 벌리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 아들이 아버지 없이 자라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 -224p

수염패랭이, 레몬백함. 협죽초와 앵초.

...강 위 언덕의 가족묘지. 물, 산, 들판 덕분에 처음으로 감각이 돌아왔다.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 낡은 집 지붕이 멀리 보였다. 쥐, 다람쥐, 호저 들이 사는 곳. 아이들에게는 귀신 나오는 집. 기도 중간에 바람이 약해졌다. 멀리서 전기처럼 찌릿찌릿한 비 냄새가 났다. 나뭇잎들 사이에서 나는 소리. 그루터기, 수명이 짧다고 프리스비 신부가 말한다. 그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비가 더 말을 잘하고, 기운을 복돋워 주고, 자비롭다. 사람 귀에 닿는 가장 오래된 소리. -234p

...낯선 대도시에서 맺어진 이 비공식적인 결혼 또는 결합 덕분에 코벌리는 몹시 행복했다. 그녀는 사랑받는 쪽이었고, 그는 사랑하는 쪽이었다. 이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었으며 이것이 코벌리의 기질에도 잘 맞아서 그는 뭔가를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처럼 활기차게 그녀에게 구애했고,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친구를 찾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실망을 맛보았고, 코벌리는 그 실망감과 분노를 없애줄 수 있었다. ... 그는 그녀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마음속 깊숙한 곳에 뛰어난 인간적 감성과 애처로운 방랑자 기질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연인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면서도 그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 늦겨울에 코벌리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벳시의 반응은 산만했지만, 그래도 눈물을 글썽이며 예쁘게 굴었다. -248p

리앤더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젊었을 떄도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곤봉으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던 기억이 났다.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궁금했다. 로렌조는 일기장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악마를 만나거든 놈을 둘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야 한다고. 오노라의 행동이 딱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게처럼 신중하게 삶을 살아온 것이 혹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무절제, 마음의 평화처럼 우리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면전에 들이미는 것들을 피해 옆걸음질하다가 그녀가 활기찬 노년의 수수께끼를 밝혀 낸 것 같기도 했다. -303p

3부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도깨비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395p

4부
...그런데 비가 내리기 전, 이 낡은 집이 이미 사라져 버리거나 흉내 내야 할 생활 양식이 아니라 웃음처럼 따뜻하고 덧없는 삶의 이상처럼 보였다. 그가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어떤 것처럼.
  리앤더는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뒤에 코벌리는 아론의 셰익스피어 책을 펼쳤다가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충고."라고 써 놓은 쪽지를 발견했따. 그 내용은 이러했다.
"건조한 지역이나 나라의 경계선을 넘어갈 떄는 절대 위시키를 보온병에 넣지 마라. 고무 때문에 맛이 변할 것이다. 절대 바지를 입은 채 사랑을 나누지 마라. 위스키에 맥주를 타는 건 아주 위험하다. 맥주에 위스키를 타는 건 전혀 겁낼 필요 없다. 위스키를 마실 떄는 사과, 배, 복숭아 등을 절대 먹지 마라. 프랑스 식으로 오랫동안 만찬을 즐기면서 맨 마지막으로 과일을 먹을 때만 빼고. 다른 음식들이 진정 효과를 내니까. 달빛을 받으며 잠들지 마라. 과학자들 말로는 그것이 고아기를 불러온다고 말한다. 침대가 창가에 놓여 있다면, 맑은 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블라인드를 내려라. 시가는 손가락과 직각으로 들지 마라. 촌스럽다. 시가는 대각선으로 들어라. ...공포는 녹슨 칼날 같은 맛이 난다. 그것을 절대 집 안에 들여놓지 마라. 용기에서는 피 맛이 난다. 꼿꼿하게 서라. 세상에 감탄해라. 부드러운 여자의 사랑을 즐겨라. ..." -461p

작품해설 - 일상성의 미학
"소설이란 예술이며, 예술은 혼돈에 대한 승리" - 치버

"문학은 저주받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문학은 연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안내해 준다. 또한 절망을 몰아내고 어쩌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을을 써야 할 필연성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자신의 유용성을 찾아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치버

치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장밋빛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중간쯤 이르러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치버는 자신의 문학에 대해 동료 작가 허버트 골드에게 "무너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오늘날 강력한 삶의 부조리성 떄문에 나는 전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갑자기 부조리해진 세계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치버는 단편소설에서 장편소설로 눈을 돌렸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이번에는 좀더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발전하기도 한다. 즉 치버는 이 작품에서 때로는 이중적 인간성을 다루기도 하고, 때로는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근엄하고 품위있는 사회적 가면 뒤에는 내적 부패나 타락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삶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심연이 가로놓여 잇었다. 이 작품에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모순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한편 모지스와 코벌리 사이의 갈등과 긴장은 상징적으로 선과 악의 대립을 보여 주기도 한다. 물론 치버는 선과 악을 뚜렷이 대조하거나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을 택하지는 않는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지혜란 선과 악을 꺠닫는 데 있을 뿐 그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고 못 박아 말한다.

신고

'me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Wapshot Scandal  (0) 2011.11.27
Et dukkehjem  (0) 2011.11.09
The Wapshot Chronicle  (0) 2011.10.26
La Jalousie  (0) 2011.10.23
Петербургские Повести  (0) 2011.10.17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0) 2011.10.11
Posted by jimmii

댓글을 달아 주세요

La Jalousie

me/literature 2011.10.23 22:43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La Jalousie by Alain Robbe-Grillet



질투에 눈먼 자의 감정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나열했다고 해서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읽기 시작했는데 쉽진 않다.

읽는 중보다 읽고 나서 맨 뒤에 작품 해설을 읽고 나서야 좀더 이해가 잘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두명의 작품 해설중 앞부분 해설자는, 마치 이 작품을 새로운 소설 기법의 창시자처럼 떠받드는 느낌이었는데,
난 잘 모르겠다. 일단은 해설자가 객관성을 잃고 작가를 칭송하는 것도 독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개인 블로그 서평도 아닌데 말이다..
또한 도대체 바나나 나무의 정렬 상태를 병적으로 말하는 건 좋지만 그걸 독자에게.. 한문장 한문장 다 읽기를 바라면서 쓴 것인가?
그래, 좋다. 세상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관찰식, 그것도 초 사실적인, 한 틈도 남기지 않고 묘사한 형식은 좀 힘들었다.. 농장들을 묘사하는 부분들은 처음에는 그렇다 쳤지만 갈수록 읽는 것조차 고역이어서,
어쩔 수 없이 띄엄 띄엄 건너 읽어야만 했다는 것..
또한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집요하게 부정하고 묘사만 해대는 화자같은 인물은,
그냥 현실세계였다면 쓰레기 찌질이같은 인간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투영된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보는 내내 좀이 쑤셔서 정말 얇은 책 치고 빨리 후딱 해치우고 어서 다른 책으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신고

'me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t dukkehjem  (0) 2011.11.09
The Wapshot Chronicle  (0) 2011.10.26
La Jalousie  (0) 2011.10.23
Петербургские Повести  (0) 2011.10.17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0) 2011.10.11
The Sea, The Sea 2  (0) 2011.10.08
Posted by jimmii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Петербургские Повести by Николай Гоголь



1. "러시아의 모든 사실주의 작가는 고골의 외투자락에서 나왔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
2. 환상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3.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다
는 것에 혹하여 아주 급박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나에게) 만담가처럼 느껴졌다면
고골은 거의 블랙유머, 머저리들을 묘사하면서 그 이면에서 아주 신랄하게 무언가 부조리함을 꼬는 느낌이다.
캐릭터로 치자면 인생의 베일에서 워딩턴의 삶의 자세같은...?
네이버에서 보니 김연경 교수님이 고골을 소개한 글도 있던데 언제 꼭 읽어봐야겠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037
코를 다 읽고 외투 읽는 중.
너무너무 너무너무, 재밌다..
가끔씩 하인리히 뵐이 카라티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보여준 도청에 관한 이야기, 에서 느꼈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아.. 감격적이다.
이런 소설을 읽고 있다니 너무 행복하고 행운인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

어젯밤 광인일기를 읽었다. 처음엔, 야 이거 완전 제대로네, 이러다가, 주인공이 실제로 파국에 다다르는 후반부에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끔찍하고, 뭐랄까, 이건 그가 아무리 정신없이 웃긴 말을 해도 이제 웃기다기 보단 입 양옆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붙잡는 무언가 근육의 움직임을 나도 멈출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 읽고 뒷부분에 작가의 해설을 읽었는데, 실제로 작가 자신도 말년에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들으니 이건 마냥 상상속의 인물이 아닌,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듯한 느낌이 들어 섬뜩하기도 했고..또다시 나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광인 일기. 조서. ... 알고싶다.

****************************************

신고

'me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Wapshot Chronicle  (0) 2011.10.26
La Jalousie  (0) 2011.10.23
Петербургские Повести  (0) 2011.10.17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0) 2011.10.11
The Sea, The Sea 2  (0) 2011.10.08
The Sea, The Sea 1  (0) 2011.09.19
Posted by jimmii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